나만의 색깔과 자리 찾아가기

 

일반적인 궤도를 벗어나 스스로 영역을 넓혀가는 이 시대의 오디티들의 이야기 '오디티 토크'. 지난 10월 17일, CGV 명동역 씨네 라이브러리에서 열린 9번째 오디티 토크는 권서영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했습니다. 

개인 작업이든, 다양한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이든 권서영 작가의 작품은 자기만의 색깔과 세계관이 뚜렷합니다. 1부는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방법', 2부는 ‘나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방법'으로 2시간을 꽉 채웠던 오디티 토크였는데요, 이번 글에서 주요 내용을 공유합니다.


1부 -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방법

1. 나의 색깔을 보여주는 키워드 찾기

저의 작품들은 그릴 때부터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 모여서 결과적으로 일관성이 생겼어요. 크게 세가지 키워드로 나눌 수 있습니다 - 비현실성, 소녀-여성 인물, Eat(먹는 것).

키워드 1. 비현실성
‘비현실성'이란 키워드는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냈던 성장 배경에서 비롯됐어요. 스무살까지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살았는데요, TV를 보면 재밌는 일들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었어요. ‘저기로 가야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스무살까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만화에 빠져서 살았어요. 만화를 보며 ‘저런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그림에도 반영이 된 것 같아요. 

키워드 2. 여성
2번째 키워드는 ‘여성'인데요. 제가 봐왔던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여성이 많았고, 제가 여자니까 여자를 그리는게 저에겐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 들어 ‘너무 10-20대의 비슷한 여성상을 재연하고 있지 않은가'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 작업은 제가 최근 그렸던 커미션 작업이에요. “일상적인 보통날, 유방에 결절을 발견하게 된 Gina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조금 다른 부분을 보여주는 작업을 더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권서영 작가의 작품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권서영 작가의 작품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키워드 3. EAT
전혀 인식하지 못했는데 제가 혼자 만든 책들이 다 먹는 얘기더라고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저에게 ‘행복의 이데아'란 ‘많은 음식이 채워진 식탁'이었어요. 어렸을 때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봐도 저는 ‘하이디가 먹었던 흰 빵, 염소젖 치즈, 할머니가 짜준 우유’ 이런 거에 꽂혔거든요. 먹는 것은 모두 공감하는 즐거움의 코드고, 이야기에 녹았을 때 사람들이 그 세계 속으로 공감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되는 것 같아요.

최근에 출판된 권서영 작가의 그림책 &lt;시루의 밤&gt;

최근에 출판된 권서영 작가의 그림책 <시루의 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과 남들이 내게서 보고 싶어하는 것”이 일치하는 작가가 행복한 작가라고 생각해요.” - 권서영 작가


2. 메모에 집착하는 소재 수집가

저는 메모에 집착하는 소재 수집가입니다. 제가 쓰는 도구는 아날로그 노트, 아이폰 메모지, 그리고 아이패드예요. 

1) 아날로그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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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메모하는 이유는 휘발되는 생각을 붙잡기 위해서예요. 또박또박 예쁘게 쓰다보면 왜 소중했고 재밌었는지를 까먹어서 막 씁니다. 책을 읽다가 생각나는 걸 쓰기도 하고요.


2) 아이폰 메모지
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나면 종이에 쓸 수 없으니 생각날 때마다 아이폰에 씁니다. 질문, 생각 등일 수 있는데 나중에 이 메모가 다시 저의 그림이 됩니다.

3) 아이패드
앞에 두 개는 자연스럽게 나는 생각을 쓴다면, 아이패드는 조금 쓰임새가 다릅니다. 아이패드는 억지로 생각해야 할 때, 좋은 게 나올 때까지 계속 계속 그립니다. 

제가 메모하는 이유는 재료의 pool을 채우는 게 목적이에요. 다양한 소재와 아이디어를 재산을 축적하듯이 쌓아둡니다. 창의성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닌, 이미 있는 것들 중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조합하느냐의 문제예요. 

인테리어 하는 분들이 가구나 소품을 전부 만들진 않잖아요. 기성품 중에서 공간에 어울릴만한 것들을 선택하고, 어울리는 것들로 의미있는 시너지를 만드는 건데요, 그림도 이미 있는 재료들을 조합해서 창의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3. 아이디어가 작업으로 발전하는 과정

저의 작업 과정을 몇 가지 보여 드릴게요. (실제 토크에서는 4가지 사례를 보여줬으나 해당 글에서는 두 가지 사례만 소개합니다.)

1) 동아기획 LP
음악 레이블 비트볼 뮤직에서 ‘동아기획 LP’를 기획하면서 저에게 의뢰를 줬어요. 키워드가 ‘레트로, 90년대 서울’이었는데요, 서울에서 90년대에 안 살아서, 온라인으로 자료조사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아이패드로 스케치를 했습니다. 가상의 80년대 서울 거리를 그리고, 방향성을 설명했어요. 색깔이 중요해서 어떤 베리에이션이 좋을지 계속 고민하고, 별색 인쇄와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최종본이 완성되었습니다. 

2) CHEEZE EP <PLATE> 2019

이것도 올해 한 작업입니다. 가수 ‘치즈'의 앨범 커버예요. 치즈가 소속된 음악 레이블 매직스트로베리와 미팅을 통해서 캐릭터를 만들어 ‘치즈'의 이미지 메이킹을 함께 했습니다. 레이블과 아티스트가 어떤 걸 원하는지, 제 그림에서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지를 듣고, 아이디어 스케치를 했습니다.

‘일상적인 느낌을 가진 세련된 팝 음악'이란 생각이 들어서, 일상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느낌을 함께 녹여내는 게 목표였어요. 아침, 점심, 저녁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감성을 표현하려고 했고 색깔도 그에 맞게 선택했습니다. 이후 몇 달 뒤 포스터까지 같이 작업하게 되었어요. 

결국 아이디어가 작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재료를 파악하고, 모으고,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4.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 나만의 스타일 찾기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SNS에서 좋다고 하는 게 너무 많고, 다 자기 것이 좋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 보면 진짜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는 잊혀지기 쉬운 것 같아요. 

내가 좋아서 팔로우하고 있는 게 뭔지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스타일, 브랜드, 소설, 시, 영화 등. 왜 좋아하는지를 기록하고 생각해보세요. 모두 촘촘히 엮여있습니다. 오리지널과 아류가 애매하게 함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자기 기준과 안목이 필요해요. 

1) 나의 스타일을 찾기 전에 먼저 고민해볼 것

그림 그리는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만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싶을 때 아래 질문들을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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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작업방식인가?
너무 고통스럽고, 시간이 오래 걸리면 본인에게 안 맞는거예요.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그림을 찾아보시면 좋아요.

이렇게 그릴 때 진짜 재밌고 행복한가?
남이 좋다고 해서 좋은 건지, 스스로 이렇게 그릴 때 재밌고 행복해서 좋은 건지 생각해보세요.

상업성이 있는가?
돈을 좇으란 얘기가 아니라 내 그림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보세요. 요즘 SNS 마케팅도 성장하고 있고, 팔리는 그림과 안 팔리는 그림의 차이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일단 본인의 그림을 굿즈로 만들어서 직접 판매해보고,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 지 포인트를 생각해보세요.


2) 창작의 다양한 층위를 탐색해보자 (무언가,누군가의 팬 이신가요?)

뭔가 그리고 싶은데 뭘 그려야할지 모르는 분들에겐 2차 창작을 해봐도 좋다는 얘길 하고 싶어요. 모두 누군가의 팬이고 뭔가를 좋아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저는 그때 관찰력이 증대하고 순애보적인 감정이 발동해요. ‘뭘 그려야할까’ 생각이 들면 좋아하는 걸 표현해보세요. 2차 창작이 포트폴리오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시작점이 빠른 게 좋습니다. 10장이든, 100장이든 먼저 그려보시고 편안한 방식을 찾아가보세요. 

만화만큼 저에게 영향을 많이 준게 K-Pop입니다. 

프리랜서로 한 첫 작업, 레드벨벳의 환생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

스페이스오디티에서 만드는 종이잡지 블립 매거진 0호의 커버도 그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 재밌어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유튜브 보면서 12 멤버들의 성격을 파악하고, 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그렸습니다. 저도 팬이라 팬의 마음으로 조금 더 예민하게 작업했어요. 저는 저와 함께 일하는 파트너를 설득을 많이 하려고 해요. “왜 이게 좋고, 이렇게 했는지" 설명을 꼭 쓰고, 충분히 서로 공유, 공감하는 과정을 거쳐 납득을 하면 작업합니다. 

권서영 작가가 작업한 아이즈원 일러스트레이션 for 블립 매거진

권서영 작가가 작업한 아이즈원 일러스트레이션 for 블립 매거진

3) 나만의 스토리텔링

저는 남들이 하지 않는 독특한 얘기를 하는 것이 또 저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요. 스토리텔링도 스타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작업이 도드라느지는 게 이 일러스트 시리즈입니다. ‘처음부터 그려야지’ 하고 그린게 아니라, 안 쓰는 파일과 메모를 뒤지다가 아이디어를 발견했어요. 아이디어로부터 스케치를 그리고, 2시간에 걸쳐 이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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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마을의 달을 물어가서 소녀들이 걱정한다는 내용”이에요. 뒤가 있으면 재밌을 것 같아서 혼자서 연재를 했습니다. 한컷 그리고 올리고, 사람들 반응 보고. 이야기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이 좋아하고 댓글로 의견을 주더라고요. 제가 스토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 계기예요.

5. 단점을 지우기보다는 장점을 극대화하기 

제가 생각하는 제 그림의 장점은 인물이에요. 인물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아마도 제가 인물 그리기에 훈련이 되어 있고, 많이 그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한편으로 제 그림의 단점은 조금 정신이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도 제 개성일 수 있거든요. 보통 처음 그림을 그리다보면 자신의 못난 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단점은 사실 자신의 돌출점이고 개성이 될 수 있는 씨앗이에요. 그걸 깎아내리다보면, 평범해질 수 있어요. 단점을 지우려고 하지 말고, 장점을 극대화해보세요.


2부 - 나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방법

1부인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방법'에서는 권서영 작가님이 아이디어를 내고, 작업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면, 2부인 ‘나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방법'에서는 3년 넘게 프리랜서로서 멋지게 활동 중인 작가님의 경험을 바탕으로 페이부터 계약서까지 현실적인 조언을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2부에는 작가님의 철학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많았는데요, 작가님이 작업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 ‘멘탈 관리'입니다. 인사이트가 가득했던 작가님의 문장 몇 가지를 공유합니다. 

“혼자 일할 때 가장 힘든 점은 외롭다는 거예요. 제가 놀 때는 친구들이 회사에 있고요. 기쁜 일, 힘든 일이 있어도 나눌 동료가 없다는 게 좀 씁쓸할 때가 있어요. 예전에는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하지' 생각했다면, 요즘에는 ‘잘했어' 하고, 스스로 저를 칭찬해주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일하는 게 좋은 삶을 위한 거고, ‘좋은 삶'을 위한 일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밸런스가 잘 잡혀 있어야 좋은 작업도 나오고 인생도 행복합니다.


“본인이 무엇을 할 때 기분이 좋은지 알아야 해요. 요즘 제가 맹신하는 것은 요가입니다. 정신이 설거지 되는 느낌이 들어요.”


“항상 작업을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해야하는 일을 해야할 때, 저는 음악의 힘을 많이 빌립니다.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음악 리스트를 갖고 있는 게 좋아요. 저는 주로 아이돌 케이팝을 듣고 무드를 붕붕 뜨게 만듭니다.”


“저도 흰 레이어에 대한 공포증이 큰데,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으면 무섭잖아요. 점이라도 찍고 선 하나 그리면 시작하는 느낌이 들어요. 5~10분 그리다 보면 별로여도 뭔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함께 일하기 편한 사람이 됩시다. 불안하게 만드는 게 최악이에요. 항상 100만큼의 결과물을 내지만 마감을 잘 안 지키고, 잠수도 잘 타는 사람과 8~90만큼의 결과물을 내지만 일을 괜찮게 하고, 마감을 잘 지키고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사람. 둘 중에 어떤 사람이 더 일을 꾸준히 받을 것 같으세요? 전자의 퍼포먼스가 더 좋더라도 사람들은 후자를 신뢰합니다. 신뢰는 프리랜서의 중요한 자질이에요.”


“이 일을 내가 받았을 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많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준에 대해 얘기를 해 볼게요. 저의 기준은 세 가지예요. 

1) 나의 스타일과 기존 작업을 존중해주는 사람
2) 프로젝트가 대변하는 가치가 나의 작업, 가치관과 어긋나지 않을 것
3)페이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아무리 페이를 많이 주고, 좋은 브랜드라도 저는 꼭두각시처럼 모두 수정해야 하는 일은 제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성차별적인 내용이 있거나 윤리적인 작업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돈을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돈을 받아야 긴장감을 가지고 일해요.”


“앞으로 저희가 할 일이 많잖아요. 망칠 일도 많고, 실수도 많을 거예요. 그때마다 실망하거나 정체되어 있지 말고, 앞으로 다른 프로젝트가 있을테니까 건너가는 힘을 길렀으면 좋겠어요. 이게 모여서 프로젝트가 되고, 나 자신이 되는거니까 최선을 다하시고요. 저도 작은 일, 큰 일 잘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제 자리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함께 자신의 색깔과 자리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만 과정 자체로 보람있는 일입니다. 작가님의 이야기 중 처음부터 의도한 게 아니라 ‘돌이켜보니' 자신의 색깔을 발견한 게 재밌었어요. 누구나 좋아하는 것들을 파고들다보면 그게 쌓이게 되고, 돌아봤을 때 자신의 색을 발견하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2부의 이야기는 프리랜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가며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일을 하는 이유와 누군가와 함께 일할 때의 태도, 나의 마음을 챙기는 일은 어떤 일을 하든 중요한 것 같아요. 

2시간을 꽉 채워 목이 쉴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나눠준 권서영 작가님과 그날 오디티 토크에 오셨던 분들에게 다시 한 번 작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세상 수억개의 색깔 중 자신에게 맞는 색과 자리를 찾아가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다음 오디티 토크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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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hley